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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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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d?
As usual,

“왜 왔겠어?”

데클란이 이곳을 제발로 찾는 이유는 항상 같았다. 정작 다쳤을 때는 머리털 하나 안 보이면서 농땡이 피울 때만큼은 잘 보이는 족속 중 하나였다. 밖으로 쫓겨난 테리를 보며 이제 건강한가보네, 하고 피식 웃고는 태연하게 침대에 팔을 베고 누워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었다.

“여긴 언제 와도 분주하네, 군병원에서 일할 때 생각난다니까.”

진절머리 난다면서도 찾게 되는 건 결국 몸에 밴 직업병 같은 걸지도 모른다. 약품 냄새가 몸에 익어버렸으니까.

“오늘은 몇이나 왔다갔어?”


H는 눈썹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그 자리에 앉아 농땡이를 피울 생각인 모양이었다. 침대 위에 드러누운 데클란을 보니 약을 올리는 것 같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백의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넣고는 혀로 굴렸다. 달콤한 맛이 피로를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듯했다.

“오늘만 열 명은 넘게 왔다 갔지. 니케 그 녀석도 왔었고. 아까 테리도 그렇고.”

창가로 걸어가 블라인드를 내리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오후의 햇빛이 너무 강했다. 눈이 시리도록. 다크서클이 짙어진 눈을 손등으로 부비며 고개를 저었다.

“담배는 밖에서 피워. 여기 산소통 있는 거 몰라? 그리고 내 침대에서 신발 신고 누우면 그날로 너 치료 안 해준다.”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의 눈빛은 실제로는 그렇게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데클란이 다치지 않은 모습으로 온 것에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의무실 한쪽에 놓인 약품 선반으로 향했다.

“아까는 J가 데리고 온 신입 에스퍼들 검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다들 게이트 에너지 영향으로 신체 균형이 완전 엉망이더라.”

“아, 맞다. 그 녀석들 중에 한 명은 네 능력이랑 비슷한 것 같더라. 진동 제어. 아직 미숙해서 어제 실수로 식당 유리창을 다 깨먹었다는데...”

그의 몸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손에 들고 있던 약병을 놓칠 뻔했지만, 겨우 붙잡았다. 어지러움이 찾아온 듯했다. 금방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관찰력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체력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진짜로, 왜 왔어?”


“나이는 내가 더 많을 텐데 꼬박꼬박 반말 쓰지.”

딱히 신경은 안 쓰는듯 툭, 내뱉고는 물고 있던 담배의 필터를 잘근잘근 씹기만 한다. 어차피 불 붙일 생각은 없었다. 말마따나 산소통도 있고, 나름 면허도 있는 사람으로서 남은 양심이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 손에 들린 약병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그를 눕혔다.

“물어볼 시간에 잠이나 자라. 잠깐 봐줄테니까.”

어지럼증을 느낄 정도면 쪽잠도 제대로 못잔 모양인데. 정말 농땡이 부리러 왔던 거지만... 잠깐 그정도는 선배로서 해줄 수 있으니.


H는 어이가 없다는 듯 데클란을 쳐다봤다. 갑자기 침대로 밀쳐지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풀썩 누워버렸다. 약병은 어느새 데클란의 손을 거쳐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래? 평소라면 귀찮다는 듯 구석에 처박혀 있거나, 아니면 제 할 말만 하고 훌쩍 떠나버렸을 텐데.

“야, 너 뭐 하는…….”

항의하려던 목소리는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몸이 침대에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핑 돌던 어지럼증이 스르르 가라앉는 대신,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듯한 나른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빌어먹을, 진짜 한계였나.

입에 물고 있던 롤리팝 막대가 힘없이 침대 시트 위로 떨어졌다. 단맛이 사라진 입안이 썼다. 젠장, 이거 비싼 건데. 하지만 그걸 주울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데클란이 제 이마에 손을 올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시야가 가려졌다. 아마도 제 눈 위에 손수건 같은 것을 올려둔 모양이었다.

“…내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지금.”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꾸할 힘도 없었다. 콧잔등을 타고 흐르는 레더리한 향수 냄새. 데클란의 체취였다. 평소라면 인상을 찌푸렸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묘하게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냥 모든 감각이 무뎌진 걸지도. 얇고 둥근 은테 안경 너머로 보이던 세상이 흐릿해지면서, 점차 암흑으로 변해갔다.

정신을 놓기 직전, H는 문득 이 상황이 꽤나 우습다고 생각했다. S급 에스퍼, 이글아이의 리더라는 작자가 고작 A급 에스퍼, 그것도 제멋대로인 데클란에게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다니.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까무룩 정신이 아득해졌다. 며칠 밤낮을 새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데스사이드’ 이후로는 만성적인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렸지만, 이렇게 누군가 곁에 있어 주는 건, 그것도 데클란 같은 녀석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제 숨소리인지, 아니면 곁에 서 있을 데클란의 것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모든 걸 놓고 잠들고 싶었다. 밀려드는 졸음은 거부할 수 없는 해일과도 같았다.

“…시끄럽게 하면 죽는다, 인마.”

잠결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거의 기어들어가는 수준이었다. 평소의 까칠함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깊은 피로에 지친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들렸다. 한쪽 팔을 들어 눈 위에 올려진 것을 치우려 했지만, 그마저도 힘에 부쳤는지 다시 툭 떨어졌다. 이마를 덮고 있던 난잡한 분홍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베개 위로 흩어졌다. 꽉 다물려 있던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쌕쌕거리는 소리보다는 조금 더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오랫동안 숨 막히는 물속에 있다가 겨우 수면 위로 올라와 허겁지겁 공기를 빨아들이는 사람처럼.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구부정했던 등이 침대 매트리스 속으로 조금 더 깊이 파고드는 듯했다. 흰 셔츠는 보기 흉하게 구겨졌고, 바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H에게는 오직 잠, 깊고 평온한 잠만이 유일한 처방전인 듯했다.


진짜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네. 떨어진 사탕을 치우고, 안경도 벗겨주고, 구겨진 옷까지도 삭삭 펴준 뒤 담요를 덮어줬다. 누운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푹 잠드는 게 어지간히도 시달렸던지. 간이 천막을 치고, 블라인드까지 내려 햇빛을 가려준 뒤 잠깐 동안 의무실의 상태를 H 대신 봐줬다. 능력이 아니라 현대 의학의 도움이니 일반적 상식을 넘어선 부상은 어쩔 수 없겠지만, 자잘하다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으니까.

두어시간 정도 대신 일하고서는 왜 군병원을 나왔는지 체감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의사로서 산다는 건 정말. H는 어디갔냐는 물음에는 전부 커튼 뒤를 가리켰다.


얼마나 잠들었던 걸까. 뇌수를 휘젓던 것 같은 어지럼증은 가라앉았지만, 대신 온몸이 솜처럼 무겁게 늘어졌다. H는 뻑뻑한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렸다. 익숙한 의무실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어둑한 실내는 평소보다 고요했고, 약품 냄새 사이로 희미하게 데클란의 레더리한 향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제기랄, 이 녀석 아직도 안 갔나.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평소보다 더딘 움직임이었다. 간만에 깊이 잠들었던 탓인지, 아니면 그저 만성적인 피로가 누적된 결과인지 알 수 없었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벗어둔 기억이 없는 안경이 침대 옆 협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바닥에 떨어뜨렸던 롤리팝도 보이지 않았다. 구겨졌던 셔츠는 누군가 애써 편 듯 제법 반듯해져 있었고, 어깨 위로는 얇은 담요까지 덮여 있었다.

‘…이걸 다 저 녀석이? 데클란이?’

H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평소의 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귀찮은 일은 질색하는 주제에, 제멋대로 의무실을 점거하고 농땡이나 피우던 녀석이. 고작 몇 시간 잠든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변덕인가.

그때, 간이 천막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데클란이었다. 환자용 의자에 앉아 서류 같은 것을 뒤적이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어깨가 드러나는 검은 터틀넥과 가죽 재킷. 여전히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였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익숙했다. 군의관 시절의 버릇이 아직 남아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정말로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건지도.

H는 침대에서 내려와 맨발로 바닥을 딛었다. 차가운 감촉에 정신이 조금 드는 듯했다. 머리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심장을 짓누르던 압박감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휘청거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졸음기 탓에 여전히 몸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인마, 너 여기서 뭐 하냐.”

목소리는 잠에 잠겨 잔뜩 쉬어 있었다. 평소의 까칠함보다는 나른함이 더 많이 묻어났다. 데클란이 고개를 돌려 H를 쳐다보았다. 그 무심한 백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H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고 진짜로 하고 있던거냐?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네.”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듯 말했지만, 어딘가 어색함이 배어 있었다. 데클란이 조용히 일어나 H에게 다가왔다. 그가 내미는 것은 따뜻한 물이 담긴 종이컵이었다. H는 잠시 망설이다가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미지근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왔다.

“꼴랑 두어 시간 잔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만은… 그래도 머리는 좀 맑아진 것 같네.”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입안이 건조했던 모양인지, 물이 달게 느껴졌다. 슬리퍼를 찾아 신고는 다시 한번 의무실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다녀간 환자들이 있었던 건지, 사용한 약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폐기물 통에는 사용한 거즈와 반창고들이 보였다. 데클란이 전부 처리한 모양이었다.

“하아… 네가 의사 면허 있는 게 이럴 땐 도움이 되긴 하는구만. 사고 안 치고 잘 했냐?”

피식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조금 복잡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특히나 그 대상이 데클란이라는 점이 더욱 그랬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약간의 고마움과 안도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걸 순순히 인정할 H는 아니었지만.

“됐다, 이제 내가 할 테니까 넌 가서 쉬든가 말든가 해라. 또 환자 몰려올 시간 다 됐으니까.”

어느새 평소의 H로 돌아온 듯, 그는 다시 백의를 여미고 제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여전히 피곤함은 가시지 않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였다. 그는 새 롤리팝을 찾아 입에 물었다. 단맛이 입안에 퍼지자, 조금이나마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대신 봐주기로 했잖아? 심각한 애들은 없길래 드레싱이랑 테이핑만 해서 보냈지.”

운이 좋았던 거 같기도 하고. 그가 일어난걸 확인하면 잘근잘근 필터를 씹던 담배를 입에서 빼 쓰레기통에 버리고 간이 침대에 팔을 괸채 태평하게 누웠다.

“간만에 예과 시절 생각나더라.”

쭉, 기지개를 펴고는 스스로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안 그래도 곱슬거리는 머리가 그 손길에 붕 뜨더라.

“솔직히 면허 없는데 여기까지 버티고 있는 네가 신기하긴 해. 능력이란 게 뭔지.”

적어도 H에게는 그 능력이라는 게 철천지 웬수같을 게 뻔했지만.


H는 제멋대로 간이 침대에 다시 드러눕는 데클란을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았다. 기지개를 켜며 부스스하게 헝클어트린 검은 반곱슬 머리가 꼭 까치집 같았다. 저 녀석은 저런 모습마저도 폼 잡는 것처럼 보이니, 그것도 참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제법 말끔해진 자신의 옷매무새와 개어진 담요, 그리고 옆에 놓인 물컵. 어색한 친절에 H는 괜히 입 안이 썼다. 롤리팝이라도 하나 더 까서 물어야 할 것 같았다. 데클란의 말에 그는 피식, 하고 짧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약간의 허탈함, 약간의 자조, 그리고 아주 약간의, 정말 아주 약간의 고마움 같은 것.

“그러냐? 네가 보기엔 내가 대단해 보여? 면허도 없는 돌팔이가 S급 능력 하나로 버티는 게?”

그는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삐걱이는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길게 늘어진 연분홍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골반까지 닿는 머리카락은 잠결에 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넘기며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두어 시간 잔 걸로는 어림도 없었지만, 그래도 최악은 면한 듯했다. 눈 밑의 다크서클은 여전히 안경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선명했다.

“그래, 편리하긴 하지. 죽어가는 놈 살리는 데 이만한 게 또 있겠냐. 근데 말이다, 인마.”

H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롤리팝 하나를 집어 들었다. 포장지를 벗겨내자 인공적인 과일 향과 함께 희미한 피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몬스터의 피로 만든 이 사탕은 이제 그의 생명줄과도 같았다. 사탕을 입에 넣고 우두둑, 깨물었다. 날카로운 파편이 입안을 굴렀다.

“그게 사람 얼마나 피 말리는지는 겪어본 놈만 알지. 네 그 채찍 휘두르는 거랑은 차원이 다를걸. 이건 뭐, 내 수명 갈아 넣어서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블라인드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바깥의 소음이 유니온 본부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다른 에스퍼들의 고함 소리, 장비가 부딪히는 소리, 사이렌 소리… 그 모든 것이 H에게는 익숙한 배경음악과도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가끔은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그냥 아무도 모르는 데 가서 한 일주일, 아니 한 달만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퍼질러 자고 싶다고.”

“침대가 최고야, 역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폈다. 우두둑, 하고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여전히 몸은 무거웠지만, 정신은 조금 맑아진 듯했다. 데클란이 봐준 덕분에 밀려 있던 자잘한 업무는 어느 정도 처리된 모양이었다. 서류 몇 장을 뒤적이다가, 그는 다시 데클란을 돌아보았다.

“뭐, 그래도 어쩌겠냐.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어.”

“나 아니면 이 많은 부상자들, 다 죽어나갈 텐데. 성가셔도 할 건 해야지. 너처럼 농땡이나 피울 순 없잖냐.”

입으로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대신해 주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상대가 하필이면 데클란이었다는 사실이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물론, 그걸 인정하는 순간 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H였기에 절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네 덕에 잠깐이나마 눈 좀 붙였다. 사고 안 치고 얌전히 있었던 건 칭찬해주지.”


“돌팔이라고는 안했는데.”

피식 웃고는 맞는 말이지. 긍정하고 말았다. 일반 병원 의사들이야 좀 몸 갈아넣으면 된다지만 H는 정말 수명을 갈아넣고 있었으니까. 한탄에는 간만에 이 의무실의 노동환경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면허는 없어도 이미 훌륭한 의사의 마음가짐이야.”

끝끝내 솔직히 고맙다는 인사를 못하고 그리 돌려서 말하는 걸 듣고는 H답다고 생각했다. 이제 겨우 일어난 사람이 일하는 걸 방해할 생각은 없었으니 안대를 벗고 저도 잠깐 낮잠에 들었다. 일이 생기면 워치라도 울리겠지.


H는 데클란의 말에 잠시 동작을 멈췄다. 훌륭한 의사의 마음가짐이라. 면허도 없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그것도 저 무뚝뚝한 데클란이. 입 안에서 굴리던 롤리팝 막대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에 흩어져 있던 서류들을 괜히 한번 더 정리하는 척했다. 귓가가 살짝 달아오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저 만성적인 피로 때문에 열이 오르는 거라고 애써 넘겼다.

그때, 데클란이 익숙한 손길로 오른쪽 눈의 검은 안대를 벗어 협탁 위에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안대 아래 가려져 있던, 눈꺼풀을 가로지르는 희미한 흉터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H는 저 흉터를 볼 때마다 속으로 혀를 차곤 했지만, 정작 데클란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리고는, 정말 제 집 안방인 양 간이침대에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누워 버렸다. 길게 뻗은 팔다리가 침대 밖으로 살짝 삐져나올 정도였다. 저 뻔뻔함과 태평함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야, 인마. 여기가 네 개인 침실이냐? 아주 그냥 대놓고 편하게 주무시겠다, 이거지?”

목소리에는 평소의 까칠함이 잔뜩 묻어났지만,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져 있었다. 방금 전의 어색함과 당혹감을 감추려는 듯,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데클란은 이미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규칙적인 숨소리마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저 녀석도 어지간히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다. 하긴, A급 에스퍼라고 해도 게이트 임무는 만만치 않을 테니.

H는 입술을 삐죽였다. 진짜 잔다고? 여기서? 내가 지금부터 또 얼마나 많은 환자를 봐야 할지 뻔히 알면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화가 난다기보다는, 어이가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그리고 아주 약간, 아주 미세하게, 저렇게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을 보니 긴장이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빌어먹을, 이놈의 다정함은 병이라니까. 물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참나, 팔자 한번 기가 막히게 좋다.”

“나는 이제부터 또 밀려들 환자들 상대해야 하는데, 누구는 팔자 좋게 내 의무실에서 낮잠이나 자고.”

“아주 상팔자야, 상팔자.”


정말이지, 제멋대로인 녀석이라니까. 뻔뻔하게 안대까지 벗어 던지고 제 간이침대에서 잠든 데클란을 힐끗 쳐다보았다.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든 모습은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 녀석은 여기가 무슨 호텔 스위트룸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깨울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어차피 깨워봤자 또 시답잖은 농담이나 던지며 의무실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게 뻔했다. 차라리 저렇게 얌전히 자는 편이 덜 시끄럽고, 덜 신경 쓰였다. 아주 약간은.

그는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삐걱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새로 도착한 보고서 몇 장과 처리해야 할 약품 목록이 쌓여 있었다. 눈 밑은 여전히 퀭했고, 어깨는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머리가 조금 맑아진 느낌이었다. 롤리팝 봉지를 까서 입에 물었다. 익숙한 단맛과 함께 미세한 피 냄새가 훅 끼쳤지만, 이제는 이 맛이 없으면 허전할 지경이었다. 사탕을 우물거리며 서류를 뒤적였다.

의무실은 데클란이 잠들기 전과 마찬가지로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 어둑했지만, 바깥 복도에서 들려오는 부산한 발소리와 희미한 대화 소리들이 이곳이 유니온의 심장부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가끔 긴급 상황을 알리는 다급한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때면, H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5년 전의 그날 이후로, 사이렌 소리는 그에게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다. 그는 애써 고개를 흔들어 불쾌한 기억을 떨쳐내려 하며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무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C급 에스퍼로 보이는 젊은 요원이 머뭇거리며 들어섰다. 훈련 중 가벼운 타박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H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그를 쳐다보았다. 특유의 피곤함과 까칠함이 묻어나는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어디가 불편해서 왔냐. 상태 봐서 간단한 처치만 할 거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요원은 H의 무뚝뚝한 말투에 살짝 긴장한 듯 보였지만, 곧 익숙하다는 듯 다친 팔을 내밀었다. H는 능숙하지만 어딘가 귀찮음이 역력한 손길로 상처를 살폈다. 소독약을 바르고 거즈를 덮은 뒤 반창고를 붙이는 그의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면허는 없지만, 수많은 현장 경험과 그의 능력 덕분에 웬만한 의사보다 나은 실력이었다.

“됐다. 며칠 무리하지 말고, 덧나면 다시 와라. 다음부턴 좀 더 조심하고.”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요원을 돌려보낸 H는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막대만 남은 롤리팝을 입에서 빼내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새로운 것을 꺼내 물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간이침대 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데클란. 저렇게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맥이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냥 저 녀석 때문에 더 피곤해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H는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며 산더미처럼 쌓인 다음 업무 서류로 손을 뻗었다. 하루는 아직 길었다.


그 이후에 1시간도 못 돼서 울린 알람은 게이트 탓에 긴급 호출이 들어온 데클란의 것이었다. 부스스 일어나서 익숙하게 안대를 끼고 하품을 했다. 흘러내린 자켓을 어깨 위로 올리는 게 익숙해보였다. 그렇게까지 바쁘진 않았던 모양이네. 서류를 보고 있는 H의 머리카락을 북북 쓰다듬어 헤집어 놓고는 재촉하는 듯 다시 한번 삑-, 울리는 워치에 못 이겨 나갔다.

“간다. 졸지 말고.”

그새 놓고 갔는지 책상 위에는 포도당 캔디가 놓여있었다.


H는 밀려드는 서류와 씨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간간이 찾아오는 경상 환자들을 기계적으로 처치하고 돌려보내기를 반복하는 사이,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갔다. 창문 블라인드 너머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으로 겨우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뿐이었다. 입에 물고 있던 롤리팝은 이미 단물을 다 빨아먹어 밋밋한 막대만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혀로 굴리며 다음 서류 뭉치를 집어 들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관자놀이는 지끈거렸다. 이런 생활도 벌써 몇 년째인지. 새삼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조용하던 의무실 한구석, 간이침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H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데클란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손목의 워치에서 날카로운 알람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녀석은 익숙한 손길로 안대를 찾아 눈에 착용했다. 길게 하품을 하는 모습은 방금 전까지 꿀잠이라도 잔 사람처럼 태평해 보였다. H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하여간, 제멋대로인 녀석.

데클란은 흘러내린 재킷을 어깨 위로 대충 걸치더니, 성큼성큼 H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H의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사정없이 헝클어트렸다. 방금 전 간신히 손으로 빗어 넘겼던 연분홍색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치며 엉망진창이 되었다. H는 순간 말문이 막혀 멍하니 데클란을 올려다보았다. 이, 이 자식이 지금 뭐 하는…!

황당함과 짜증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지만, 데클란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재촉하듯 다시 한번 울리는 워치를 확인하더니, 미련 없이 의무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간다. 졸지 말고.” 그 한마디를 툭 던져놓고는. H는 엉망이 된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어이없다는 듯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저 인간이 진짜…!

“뭐라는 거냐, 저 자식은! 내가 졸든 말든 네가 알 바 아니잖냐! 아주 그냥 속을 벅벅 긁어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고함이었다. 물론 문밖으로 사라진 데클란에게는 닿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겼다. 안 그래도 만성 피로에 시달려 죽겠는데, 저런 쓸데없는 장난까지 당하니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역시 저 녀석과는 엮여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다고, 다시 한번 되뇌었다.

그렇게 투덜거리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책상 한구석에 놓인 작은 투명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없었던 것이었다. H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안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포도당 캔디 몇 알이 들어 있었다. 데클란이 놓고 간 것이 분명했다. 그 무뚝뚝한 녀석이 이런 걸 다 챙겨줄 줄이야. H는 잠시 봉투를 든 채 멍하니 있었다. 몬스터의 피로 만든 롤리팝과는 전혀 다른, 순수한 단맛이 나는 사탕. 어쩐지 데클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짧은 실소를 터뜨렸다. 방금 전까지 들끓던 짜증이 아주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사람 속은 있는 대로 다 긁어놓고는, 또 이런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봉투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혀끝을 감쌌다. 늘 입에 달고 사는 롤리팝의 자극적이고 인공적인 단맛과는 확연히 다른, 깔끔한 단맛이었다.

“…흥. 뭐,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거나 먹고 또 죽어라 일해야지, 별수 있겠냐.”

H는 작게 중얼거리며 남은 사탕 봉지를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여전히 온몸은 피곤했지만, 아주 약간은, 정말 아주 약간은 기운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다음 업무 서류로 손을 뻗었다. 오늘도 역시, 쉴 틈 없는 하루가 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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