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Odd?Break time⌵
한 달이라는 시간은 H에게 있어 그저 똑같은 나날의 연속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무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경상 환자들, 끊임없이 울려대는 호출, 그리고 카페인과 몬스터 피로 만든 롤리팝으로 겨우 버티는 하루하루. 그의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은 더욱 푸석해졌고, 안경 아래 다크서클은 이제 그의 일부처럼 자리 잡았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는 데클란은 여전히 제멋대로였고, 정작 본인의 몸 상태는 조금도 돌보지 않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H는 속으로만 혀를 찼다. 저 녀석은 어째서 자기 몸은 그리도 함부로 다루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도 유난히 많은 환자가 몰려 정신없이 오전 시간을 보낸 후였다. H는 너덜너덜해진 몸을 간신히 이끌고 탕비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에 인스턴트커피 가루를 대충 풀어 넣고 한 모금 마시자, 그나마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컵을 든 채 잠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휴가 가고 싶다. 진심으로. 딱 하루라도 좋으니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 잠만 자고 싶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또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 아니, 애초에 저 녀석이 의무실에 ‘일’로 찾아오는 경우가 드물긴 했지.
“…뭐냐, 인마. 또 농땡이 피우러 왔냐? 네 부서는 한가해서 좋겠다, 아주.”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와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하지만 데클란은 H의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손에는 웬일인지 작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H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봉투를 곁눈질했다.
데클란은 말없이 봉투를 H의 커피 옆에 툭 내려놓았다. 봉투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샌드위치와 작은 과일 주스 한 병이 들어 있었다. H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샌드위치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건 또 어디서 사 온 건지. 저 무뚝뚝한 얼굴로 이걸 사서 여기까지 들고 왔을 생각을 하니 어쩐지 어색하기도 하고, 아주 약간은… 아주 미세하게, 고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티를 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이건 또 뭐냐. 내가 이런 거 사다 달라고 했냐?”
애써 태연한 척, 퉁명스럽게 물었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괜히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데클란은 여전히 별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침묵이 어색해서, H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됐고, 용건이나 말해라. 바빠 죽겠으니까. 한가한 거 구경할 시간 없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자꾸만 샌드위치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맛이 전혀 없었는데, 따뜻한 빵 냄새를 맡으니 슬슬 배가 고파오는 것 같기도 했다. 빌어먹을, 이놈의 몸뚱이는 왜 이렇게 단순한 건지. 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역시, 평화롭게 쉬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부터 뭐 하나 입에 못 대길래 사왔더니 까칠하기는. 먹어, 먹어야 일 할 거 아냐.”
창가에 기대어서 서있다가 고개를 까딱여 봉투를 가리키고는 어차피 창문도 열려있겠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불어오는 바람이 담배 연기를 가지고 밖으로 흩어지는 걸보면서 팔짱을 꼈다.
“우리 교수님 지론이었지. 바쁘다고 밥 한 번 거르기 시작하면 그대로 환자랑 같이 침상에 눕게 될 거라고. 뭐라도 밀어넣으라고.”
물론, 그건 사실이었음을 병원에 있을 때 뼈저리게 느꼈지. 느릿하게 숨을 뱉었다.
H는 데클란의 말에 입술을 삐죽였다. 누가 보면 내가 굶겨 달라고 시위라도 한 줄 알겠네. 아침부터 정신없이 환자들 돌보느라 뭐 하나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녀석에게 이런 식으로 동정받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나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길 가다 떨어진 물건이라도 주워주듯 건네는 태도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신경질적으로 뺨을 간질였다.
창가에 기대선 데클란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H는 퉁명스러운 시선으로 좇았다. 열린 창문으로 싸늘한 바람과 함께 담배 연기가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탕비실 안에는 미지근한 커피 향과 데클란이 풍기는 레더리한 향수 냄새, 그리고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담배 냄새가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H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빌어먹을, 정말 배가 고프긴 한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뱃속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따뜻한 샌드위치 봉투에서 풍겨 나오는 고소한 냄새는 참기 힘들었다.
데클란이 과거 군의관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자, H는 잠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교수님의 지론이라. 하긴, 맞는 말이었다. 자신도 면허는 없지만, 이 바닥에서 구르면서 뼈저리게 느껴온 바였다.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놈이 누굴 살리겠다고. 수없이 많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체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제때 챙겨 먹는 것이 얼마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인지 지겹도록 봐왔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데클란 앞에서는.
“흥. 잘난 교수님 두셨네, 아주. 나는 뭐, 알아서 잘 먹고 잘 사니까 신경 끄시지.”
그렇게 쏘아붙이면서도 그의 손은 슬그머니 샌드위치 봉투로 향하고 있었다. 젠장, 자존심 상하지만… 배고픈 건 어쩔 수 없잖냐. 그는 봉투를 열어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샌드위치를 꺼냈다. 구운 베이컨과 신선한 양상추, 토마토가 두툼한 빵 사이에 먹음직스럽게 끼워져 있었다. 옆에 놓인 오렌지 주스 병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시니, 시원하고 새콤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H는 데클란을 애써 외면하며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짭짤한 베이컨과 아삭한 채소, 부드러운 빵의 조화가 생각보다 훌륭했다. 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맛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샌드위치 반쪽을 해치웠다. 입가에 묻은 소스를 아무렇게나 소매로 닦아내며 다시 주스를 마셨다. 조금 전까지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감이 아주 약간은 가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진짜 용건은 뭐냐니까. 이거 주고 그냥 갈 건 아니잖냐.”
여전히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아까보다는 목소리에 힘이 조금 실려 있었다. 그는 남은 샌드위치를 마저 먹으며 데클란의 대답을 기다렸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분주한 유니온의 소음이 들려왔고, 데클란은 말없이 담배 연기만 내뿜고 있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H는 왠지 모르게 초조해졌다.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꺼졌으면 좋겠는데, 동시에 이 어색한 평화가 조금만 더 이어졌으면 하는 모순적인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아, 진짜 피곤하다. 모든 게 다.
“그게 다인데. 왜, 뭐가 더 있어야 하나?”
담담하게 얘기하고는 마저 담배를 태우다가 잠시 손가락에 끼운다. 열린 입 사이로 불규칙하게 흘러나온 연기가 흩어져 밖으로 나간다.
“그냥 밥 챙겨 먹는 거 보고 가려고 한 건데.”
“거기 니케가 지난번에 주다스랑 가보고 맛있다고 해서 사온 곳이야.”
간의 의자를 당겨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비스듬히 샌드위치를 무는 걸 본다.
H는 데클란이 갑자기 냅킨으로 제 입가를 닦아주자 화들짝 놀라 뒤로 움찔했다.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데클란의 손을 쳐다보았다. 이, 이 자식이 지금 뭐 하는 거냐! 누가 보면 애 다루는 줄 알겠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태연한 척 헛기침을 했다.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그냥 소스가 묻은 것뿐인데 왜 이렇게 과민반응을 하는 건지. 그는 괜히 샌드위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살짝 헝클어져 이마를 덮었다.
“뭐, 뭐 하는 거냐, 지금! 사람 놀래키지 마라, 인마! 내가 알아서 닦을 수 있거든!”
목소리가 살짝 잠겨 나왔다. 그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방금 데클란의 손길이 닿았던 입가가 괜히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젠장, 별것도 아닌 일에 신경 쓰다니. 피곤해서 그런가.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남은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꽉 다물린 입술 사이로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배고픔은 정직했다. 샌드위치의 고소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데클란의 담담한 반문에 H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하, 참. 저 태연한 얼굴 좀 보라지. 속으로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저 녀석이 아무 이유 없이, 그것도 ‘나를’ 챙겨줄 리가 없잖냐. H는 가늘게 뜬 눈으로, 안경 너머로 데클란을 쏘아보았다. 데클란 특유의 레더리한 향수 냄새와 희미한 담배 연기가 탕비실의 커피 냄새와 섞여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됐고. 그냥 순순히 불어라.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나올 때는 뭔가 뒤가 구린 일이 있을 때뿐이잖냐.”
“설마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와서 나한테 뒤처리해달라고 온 건 아니겠지?”
“아니면 또 어디서 다쳐놓고 뻔뻔하게 치료 거부하다가 억지로 끌려온 거냐?”
그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샌드위치를 마저 씹었다. 꿀꺽, 하고 빵 조각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탕비실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흘러갔다. 데클란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침묵이 H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혹시 정말로 무슨 큰일이라도 터진 건 아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데클란이 니케와 주다스를 언급하며 태연하게 말했을 때, H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니케랑 주다스? 와이즈맨들이 추천한 가게라고? 어쩐지 김이 살짝 빠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그게 다라고? H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입 안에 남아있던 샌드위치를 마저 씹어 삼켰다.
“…니케가 맛있다고 한 거면, 뻔하지 뭐. 엄청 달거나 짜거나, 둘 중 하나겠네.”
“주다스 그 녀석은 또 뭘 같이 먹으러 다닌대. 걔는 입맛 까다롭잖냐.”
그는 입술을 투덜거리면서도 남은 샌드위치 조각을 입에 넣었다. 확실히 맛은 있었다. 적당히 짭짤하고, 채소도 신선했다. 니케의 취향치고는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는 주스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데클란을 힐끗 쳐다보았다. 저 녀석, 정말 그냥 밥 먹는 거 보러 온 건가? 믿기지 않았지만, 딱히 다른 이유를 대는 것도 아니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더 캐물어봤자 입만 아플 게 뻔했다. 안경을 고쳐 쓰며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이제 볼일 다 봤으면 꺼져라. 네 얼굴 보고 있으면 소화 안 될 것 같으니까.”
“나도 슬슬 다시 일해야 하기도 하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조금 전보다는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주스를 단숨에 비우고 빈 병과 샌드위치 포장지를 봉투에 다시 구겨 넣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놈이었다. 그리고 그런 놈에게 휘둘리는 자신도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텅 비었던 속이 채워지니 조금은, 아주 조금은 기운이 나는 것도 같았다.
“... 신뢰도 대체 어디까지 떨어져 있는 건지?”
피식 웃고는 적당히 다 태운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끄고 꽁초까지 잘 처리했다. 여전히 독한 담배의 향은 향수와 뒤섞여 잔존했지만.
“주다스가 끌려간 거지. 누나 말을 어떻게 거역해?”
와이즈맨 둘의 성향이야 뻔히 보인다는 듯 말하고는 다 먹은 걸 치우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일어났다. 슥, 종이봉투를 가져가는 팔이 스치면서 담배향이 스쳤을지도.
“다음엔 소화제도 같이 들고 와야겠네. 그래, 간다.”
특유의 재미없는 농담이다. 정말 뒤에 일정이 있는데도 그것만으로 들린 건지 미련없이 뒷처리를 하고 나갔다.
“신뢰도는 이미 마이너스 찍은 지 오래잖냐. 새삼스럽게 뭘 그걸 따지고 그래.”
“내가 뭘 기대해야 하는 건데, 응?”
데클란이 간이 의자에서 일어나 탕비실을 나설 채비를 하자, H는 저도 모르게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데클란이 샌드위치 봉투를 들고 있는 H의 팔을 스치며 지나갈 때, H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몸을 움츠렸다. 순간적으로 끼쳐오는 데클란 특유의 레더리한 향수 냄새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독한 담배 향이 뒤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신경 쓰이는 냄새였다. 그는 괜히 빈 주스 병만 내려다보며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미묘하게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뛰는 것 같기도 했다. 빌어먹을, 피곤해서 그런가.
이어진 데클란의 재미없는 농담에 H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짧게 숨을 뱉었다. 저 인간은 농담도 참 지지리도 재미없게 한다니까. 하지만 평소처럼 날카로운 반박이 즉각적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방금 전까지 뱃속을 채웠던 샌드위치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탓인지, 아니면 정말로 조금은 기운이 난 탓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아주 가지가지 해라, 인마. 맨날 속이 텅 비도록 담배나 뻑뻑 펴대면서 누굴 걱정하는 거냐, 지금.”
“얼른 꺼져, 꺼져. 너랑 얘기하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으니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날이 덜 서 있었다. 데클란이 별다른 대꾸 없이 탕비실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H는 시선으로 좇았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탕비실 안에 낮게 울렸다. 그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H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 착각일 거다. 그는 고개를 힘차게 저으며 탕비실을 나섰다. 빌어먹을, 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환자들을 마주하러 가야지. 하루는 왜 이렇게 긴 건지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