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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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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d?
Coma

그로부터 사흘이 흘렀다. H는 평소보다 더 많은 롤리팝을 입에 달고 살았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단맛에 절어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신경이 곤두서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데클란이 통신 두절 상태라는 붉은 경고등은 사흘 내내 H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식사도 건너뛰기 일쑤였다. 밀려드는 환자들을 처리하면서도 틈틈이 헌터즈 상황판을 새로고침했지만, 업데이트되는 소식은 없었다. 차라리 나쁜 소식이라도 들려오면 각오라도 할 텐데, 이 지독한 불확실성이 사람을 말려 죽일 것만 같았다.

늦은 밤, 아니 새벽이라고 해야 할 시간. H는 거의 반쯤 졸면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눈 밑은 거무죽죽했고, 평소에도 구부정한 자세는 이제 거의 폴더처럼 접힐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의무실 자동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익숙하지만 다급한 목소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H! 여기 데클란이다! 상태가 안 좋아!”

H는 거의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튕겨져 일어났다. 눈앞에는 피투성이가 된 채 들것에 실려 온 데클란이 있었다. 평소 입던 검은 민소매 터틀넥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드러난 피부 곳곳에는 끔찍한 자상과 화상이 뒤섞여 있었다. 안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감긴 눈꺼풀 주변은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숨소리는 거칠고 불규칙했다. 중상.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H의 머릿속이 순간 하얗게 비는 듯했다. 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은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들것으로 다가가 데클란의 상태를 빠르게 살폈다. 맥박, 호흡, 의식 수준. 모든 것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젠장할… 이 멍청이가 진짜! 비켜, 전부!”

그는 거칠게 소리치며 주변에 몰려든 헌터즈 대원들을 밀어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데클란의 가슴팍에 양손을 얹었다. 눈을 감고 집중하자, H의 몸에서부터 은은하고 따스한 녹빛 광채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제네바 선언". 그의 모든 것을 대가로 발현되는 치유의 권능이었다.

빛은 점차 강렬해지며 데클란의 온몸을 감쌌다. 찢어진 살점이 서서히 아물고, 검게 변색된 화상 부위가 원래의 피부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부러진 뼈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미세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H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은 바짝 말라갔다. 막대한 생명력을 소모하는 감각이 온몸을 짓눌렀지만,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골반까지 내려오는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그는 애써 외면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데클란의 거친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고, 핏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H는 마지막 힘을 짜내듯 빛의 강도를 높였다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탈력감에 휘청거렸지만, 가까스로 옆의 의료기기를 붙잡고 버텼다.

그는 여전히 의식 없는 데클란을 내려다보았다. 분노와 안도감, 그리고 지독한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사람 속 좀 작작 썩여라, 좀.”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어쩔 수 없는 걱정과 안도가 짙게 배어 있었다. H는 휘청거리며 자신의 간이침대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는 데클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H는 간이침대에 몸을 기댄 채, 색색거리는 데클란의 숨소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녀석이었다. 자신의 생명력을 쏟아부어 간신히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 듯 온몸이 축 늘어졌지만,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도 감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데클란의 상태가 급변할까 봐,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녀석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창백한 편인 그의 얼굴은 이제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며칠간 제대로 쉬지 못한 탓에 다크서클은 턱밑까지 내려올 기세였고, 골반까지 닿는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의무실의 형광등 불빛만이 싸늘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H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데클란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링거의 수액 잔량을 확인하고 체온과 맥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다행히 바이탈 사인은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조용히 새 수액을 연결하고, 데클란의 팔에 감긴 압박붕대가 너무 조이지 않는지 살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데클란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평소라면 질색하며 피했을 접촉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미약한 온기가, 그나마 H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다. 녀석의 얼굴에 남은 자잘한 상처 자국들, 안대가 사라진 눈가의 붓기, 꽉 다물린 입술. 평소의 능글맞고 태평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와 데클란의 이마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 과정에서 데클란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했지만, 착각이려니 넘겼다.

“젠장할 자식, 대체 뭘 어떻게 싸돌아다녔길래 이 모양 이 꼴이냐. 사람 걱정시키는 데는 아주 도가 텄지, 아주.”

나지막한 혼잣말에는 원망보다 걱정이 더 진하게 묻어 나왔다. 그는 선반에서 새 거즈와 소독약을 꺼내, 데클란의 몸에 남은 아직 덜 아문 듯한 작은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소독해주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큰 상처는 대부분 치료했지만, 자잘한 찰과상까지 완벽하게 재생시키기엔 소모가 너무 컸다. 그의 손길은 평소 환자들을 대할 때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소독약이 스며들 때 데클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H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꼬르륵. 배에서 울리는 소리에 H는 잠시 동작을 멈췄다. 언제 마지막으로 뭘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니케가 주고 간 에너지바가 눈에 들어왔지만 입맛이 전혀 없었다. 대신 그는 서랍에서 몬스터 피로 만든 롤리팝 하나를 꺼내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인공적인 단맛이 입안에 퍼졌지만, 피로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사탕 막대를 잘근거리며, 그는 데클란이 평소 가져다주던 샌드위치나 따뜻한 커피를 떠올렸다. 빌어먹을, 하필 이럴 때 그런 게 생각나다니.

그는 다시 간이침대에 거의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데클란의 침대와 자신의 침대 사이의 짧은 거리. 그는 그 거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평소라면 시끄럽게 떠들거나, 엉뚱한 농담을 던지며 이 공간을 채웠을 녀석의 부재가 새삼 크게 느껴졌다. 의무실은 숨 막힐 듯이 조용했고, 오직 데클란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H 자신의 심장 소리, 그리고 형광등의 희미한 소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몇 번이나 꾸벅꾸벅 졸다가 화들짝 놀라 깨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그는 반사적으로 데클란의 상태를 살폈다.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은 땀과 피로에 절어 축 처져 있었고, 은테 안경 너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며칠은 족히 밤새운 사람의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데클란이 깨어날 때까지, 아니, 깨어나서 자신에게 또 어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일 때까지. 그는 이곳을 지킬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건 일종의 책임감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일 수도.

새벽의 푸른빛이 창틈으로 스며들기 시작할 무렵, H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입에 물고 있던 막대사탕은 이미 다 녹아 없어졌고, 그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아주 미세하게 데클란의 손가락이 움찔거리는 것을 본 것 같았다. H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데클란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데클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깜빡, 깜빡. 퓨즈가 나갔던 전등이 다시 켜지듯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면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다가 조금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소독약과 붕대의 천냄새. 병원에서나 맡던 익숙한 냄새다. 일하다가 잠들었던가. 잠시 의식이 과거로 끌려갔다가, 보이는 얼굴에 다시 현재로 끌려온다. 아, 의사 때려친지 좀 됐지. 안대는 왜 벗겨져 있지? 평소 가리고 다니던 쪽이 트여있는 시야에 어리둥절했다.

“... H?”

와중 얼핏 시야 끝에 걸린 연분홍빛 머리카락에 잘못 본 건지 반신반의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흐릿했던 시야가 순간적으로 데클란에게 초점을 맞췄다. 녀석이, 데클란이 눈을 뜨고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듯했지만, 분명 의식이 돌아온 것이었다. H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심장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의자에서 급하게 일어나려다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지만, 가까스로 침대 프레임을 붙잡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는 비틀거리며 데클란의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바싹 마른 입술이 겨우 떨어졌다.

“…정신이… 드는 거냐, 인마?”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나왔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데클란의 이마를 짚었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었지만, 처음 왔을 때처럼 불덩이 같지는 않았다. 곧바로 반사적으로 데클란의 손목을 잡아 맥박을 확인하고, 다른 손으로는 그의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려 동공 반응을 살폈다. 시선이 마주쳤다. 평소와 달리 안대가 없는 데클란의 왼쪽 눈. 가로지르는 흉터가 선명했지만, 다행히 눈동자는 빛에 정상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데클란이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보고, H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아직 움직이지 마라. 며칠을 내리 잤는지 알기나 하냐? 얌전히 누워있어.”

명령조였지만, 목소리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도감과 함께 온몸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는 듯한 감각에 현기증이 일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어지러움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데클란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자, 며칠간 짓눌러왔던 피로와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와 울컥, 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르며, 평소처럼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물론, 지금 그의 몰골로는 전혀 퉁명스러워 보이지 않겠지만.

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살았구나, 이 빌어먹을 자식이. 결국 또 사람 여럿 피 말리게 하고서야 겨우 눈을 떴구나. 하지만 그 모든 생각의 끝에는, 결국 안도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쯧. 하여간 요란하게도 돌아왔네, 아주. 너 때문에 이게 다 무슨 소란인지 아냐? 다른 놈들 걱정은 둘째 치고, 내 수명이 한 10년은 줄어든 것 같다, 이 망할 놈아.”

말은 그렇게 뱉어냈지만, H의 눈가는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충혈된 눈을 감추려 하며, 옆 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집어 들었다.

“목 마를 테니, 마셔라. 천천히.”



“... 누워 있는데 어떻게 마시라고...”

일어나자마자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푸스스 웃고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물만 마시고는 다시 몸을 뉘였다. 왼쪽 손에 연결된 링거, 팔뚝에 남은 붕대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음...

“살긴 살았네.”

위독했던 사람치고는 건조한 감상이었다. 자신보다 더 몰골이 아닌 H를 잠시 보다가 슬쩍 옆자리를 냈다.

“... 네가 더 죽을 상이네. 이리 좀 와봐.”



H는 데클란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맞는 말이었다. 누워있는 사람에게 물을 마시라고 건넨 자신이 우스웠다. 그는 멋쩍게 헛기침을 하며 데클란이 상체를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물을 마시고 다시 눕는 데클란의 얼굴은 아직 창백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혈색이 도는 듯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녀석의 건조한 감상과, 자신을 향한 지적에 H는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더 죽을 상이라고? 야, 너는 방금 전까지 저승사자랑 하이파이브 하고 온 놈이거든? 누굴 걱정하는 거냐, 지금.”

그렇게 쏘아붙이면서도, H는 순순히 데클란이 내어준 침대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자신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며칠간 제대로 쉬지 못한 탓에 온몸이 쑤시고 눈앞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은테 안경 너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갈라져 있었다. 평소에는 그나마 신경 써서 묶거나 정리하던 연분홍색 머리카락은 이제 완전히 제멋대로 뻗쳐, 군데군데 하얗게 변한 부분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하얗게 변한 제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온몸의 긴장이 탁 풀리며 지독한 피로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는 애써 정신을 차리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데클란의 얼굴을 다시 한번 찬찬히 뜯어보았다. 안대가 벗겨진 왼쪽 눈가의 흉터. 평소에는 가려져 있던 부분이었다. 저 흉터 때문에 안대를 하고 다닌다고 했었지. 문득, 예전에 안경테가 휘어졌을 때 데클란이 새 안경을 가져다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 녀석은 다친 자신보다 내 걱정을 먼저 했었지. 참 한결같은 놈이었다.

“됐고. 몸은 좀 어떠냐. 아픈 데는 없고? 기억은 제대로 나고? 여기가 어딘지는 알겠냐?”

질문들을 쏟아내면서도, H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안도감이 묻어났다. 그는 데클란의 팔에 연결된 링거 줄을 점검하는 척하며, 슬쩍 그의 손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 맥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규칙적으로 뛰는 맥박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데클란에게 들키지 않으려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의무실 안은 여전히 소독약 냄새와 함께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그 정적 속에는 미묘한 안도감과 함께 살아있다는 온기가 느껴졌다. H는 슬쩍 데클란의 눈치를 살폈다. 이 녀석, 깨어나자마자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나. 아니면, 이번에는 좀 얌전히 있으려나. 어느 쪽이든,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롤리팝 막대를 잘근거리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는 것 같기도 했다.



“여기저기 두들겨 맞은거 같긴 한데 뭐... 뻐근한 근육통 정도. 기억은 멀쩡하지. 일단 네 얼굴을 알아봤으니까.”

흐릿한 시야가 조금 더 말끔하게 개고 나면 더 선명하게 그의 피로가 눈에 보였다. 며칠 밤샘을 했는지 앉는 걸로도 잠들듯 보이는데 뭔 고집이래. 맥박을 짚는 그 손을 잡아당겨서 옆에 눕히고 태연하게 팔을 얹어 안았다.

“일어나지마.”

일부러였다. 링거가 연결된 팔을 얹어 그가 억지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건.



H는 데클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 제법 묵직한 힘으로 자신을 끌어당겨 침대 위로 쓰러뜨리는 통에, 안 그래도 위태롭던 몸의 중심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데클란의 단단한 몸 위로 겹쳐진 자신의 몸무게가 느껴졌다. 젠장, 이 자식이 지금 뭐 하는…! 반사적으로 팔꿈치로 짚고 상체를 일으키려 했지만, 며칠간 축적된 피로와 능력 과사용으로 인한 극심한 탈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버둥거리는 움직임은 마치 물에 빠진 어린애처럼 허술하고 힘이 없었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당장 안 떨어지냐, 이 미친놈아! 환자면 환자답게 얌전히…!”

항의하려던 말은 데클란의 팔이 제 어깨를 감싸 안으며 턱, 하고 막혔다. 그리고 그 팔뚝에 연결된 링거 줄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자식, 일부러 링거가 연결된 팔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이 와중에도 이런 장난질을 할 정신이 남아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을 걱정해서?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상황은 H에게 있어 최악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간이침대에 성인 남자 둘이 포개져 있는 꼴이라니. 게다가 안긴 쪽이 자신이라니!

H는 다시 한번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데클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감싼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망할 놈의 근육질 몸뚱이는 이럴 때만 쓸모가 있지. 며칠 밤낮으로 긴장했던 근육들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마치 솜처럼 무거워진 몸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핑그르르 돌고, 눈앞이 아찔했다. 데클란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심장 박동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묘하게 안정적인 그 소리가, 역설적이게도 H의 마지막 남은 저항 의지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거 안 놔? 너 인마 아주 사람 못 살게 구는 데 선수라니까. 환자는 너잖냐. 내가 왜 너랑 침대에…”

목소리는 기어들어갈 듯 작아졌고, 억지로 짜낸 짜증은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처럼 위태로웠다. 데클란의 체온이 얇은 셔츠 너머로 느껴졌다. 며칠간 제대로 된 온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던 탓일까. 낯선 따뜻함에 온몸의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이대로 잠들면 안 된다는 이성과, 한계에 다다른 육체의 본능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하지만 이미 승기는 육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H는 마지막 발악처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모르겠다. 이 자식은 원래부터 제정신이 아니었고, 자신은 이제 한계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데클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며칠 동안 맡아온 소독약 냄새와 희미하게 섞인 데클란 특유의 레더리한 향수 냄새, 그리고 땀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아마 미쳐버린 게 틀림없었다.

“…잠깐만이다. 아주 잠깐만… 이렇게 있을 거니까, 착각하지 마라.”

결국, 그는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데클란의 품 안에서, 그는 길고 긴 시간 동안 처음으로 모든 것을 놓고 의식을 놓아버릴 것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빌어먹을, 이 모든 게 다 데클란 탓이었다.



결국 바둥거리다 얌전하게 눈을 감는걸 확인하고 안경을 벗겨 협탁에 올려둔다. 간이침대가 좁아 안고도 바짝 붙어야했지만 아무렴,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이 아니여도 되니까 좀 자.”

저도 슬슬 잠이 오던 차였다. 어깨에 기대오는 그의 머리를 느끼면 걸리적거릴 머리카락을 귀 뒤로 걸어 넘겨주고 자신도 눈을 감았다. 어차피 그가 먼저 깨도 자신이 자고 있는 이상 품에서 못 나가고 다시 누울걸 알기에. 그렇게라도 푹 자게 해야지.



H는 데클란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잠깐이 아니어도 된다니, 이 자식이 무슨 꿍꿍이로. 하지만 반박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데클란이 제 안경을 벗겨 협탁에 올려두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시야가 조금 흐릿해졌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세상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는 편이 지금의 심정과는 더 어울렸다. 좁아터진 간이침대에 성인 남자 둘이 누워있으니,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불편해야 마땅한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은 바닥으로 꺼질 듯이 무겁기만 했다.

어깨에 기대온 데클란의 머리칼에서 희미한 샴푸 냄새와, 녀석 특유의 레더리한 향수 냄새, 그리고 열로 인해 흘린 옅은 땀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역겹기는커녕, 며칠간 제대로 된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인지 묘한 안정감마저 느껴졌다. 젠장, 진짜 피곤하긴 피곤한 모양이었다.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데클란의 손길에 움찔했지만, 뿌리칠 힘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녀석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차갑고 큰 손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데클란의 숨소리가 점점 더 깊고 규칙적으로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 자식, 정말 잠들려는 모양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놓고서! H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그 투덜거림조차 힘이 없었다. 어차피 이 녀석이 먼저 잠들면, 자신도 꼼짝없이 여기서 자야 할 판이었다. 링거를 핑계 삼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한 건 저쪽이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아니, 억울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감정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무력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렇게라도 푹 자게 해야지.’ 데클란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빌어먹을 다정함이었다. 평소에는 사람 속 뒤집어 놓는 재주만 있는 줄 알았더니, 가끔 이렇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허를 찔렀다. 그리고 그게 또,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조금은, 고마운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입 밖으로 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의무실의 형광등 불빛이 감은 눈꺼풀 너머로 희미하게 느껴졌다. 소독약 냄새, 붕대 냄새, 그리고 데클란의 체취. 이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의 자장가처럼 H를 잠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미 한계였다.

“…맘대로 해라, 인마. 나도 이제 모르겠다.”

결국, 거의 잠꼬대에 가까운 중얼거림과 함께 H는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며칠 만에 찾아온, 저항할 수 없는 평온함이었다. 데클란의 품 안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그의 심장 소리는 이상할 만큼 규칙적이었다.


2
Odd?
Best sleep

찌뿌둥한 몸의 감각과 함께 의식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온몸의 관절이 삐걱거리는 듯 뻣뻣했고, 특히 목과 어깨는 누군가 일부러 비틀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뻐근했다. 으음… 작게 신음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처음에는 익숙한 의무실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나 곧,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검은색의 무언가와, 제 뺨에 와닿는 단단하면서도 규칙적인 온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지?’

잠이 덜 깬 뇌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제멋대로 뻗친 검은 머리카락, 얕게 들썩이는 넓은 가슴팍, 그리고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묵직한 팔. 데클란. 이 망할 자식의 품 안에서 잠들었던 건가. 그것도 아주, 푹. 기억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자 H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 아니, 언제 잠들었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 그 순간의 체념과 피로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미쳤지, 내가.

그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고개만 살짝 들어 주위를 살폈다. 창문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의 각도로 보아, 아무리 못해도 아침은 훌쩍 넘긴 시각인 듯했다. 의무실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고, 희미한 소독약 냄새만이 코끝을 맴돌았다. 그리고 제 옆에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데클란이 있었다. 평소의 능글맞거나 무심한 표정 대신,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잠든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앳되어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 생각은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H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빠져나오려 시도했다. 하지만 데클란의 팔은 생각보다 단단히 그를 감싸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는 듯했다. 이 자식, 자면서도 힘은 더럽게 좋네. 끙, 하고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데클란은 미동도 없었다. 그의 팔뚝에 연결된 링거 줄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것 때문에라도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젠장. 얼마나 이렇게 있었던 거지? 반나절? 아니면 꼬박 하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한 게 언제였는지조차 아득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은 평소보다 훨씬 가뿐했다. 며칠 동안 그를 짓누르던 극심한 피로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고, 머리도 맑았다. 심지어 입에 늘 달고 살던 막대사탕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런 깊은 잠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H는 저도 모르게 데클란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안대가 벗겨진 눈가의 흉터는 여전히 선명했지만, 햇살 아래에서는 어쩐지 덜 위협적으로 보였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그의 귓가에 낮게 울렸다.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고 민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선 평온함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아주 천천히, 거의 밀리미터 단위로 몸을 움직여보았다. 이번에는 데클란의 팔이 조금 느슨해지는가 싶더니, 그가 잠결에 뒤척이며 H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젠장! H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코앞까지 다가온 데클란의 얼굴에서는 희미한 그의 체취와 함께, 며칠간 씻지 못했을 퀴퀴함 대신 의외로 깔끔한 비누 냄새가 섞여 풍겨왔다. …이 자식, 설마 누가…?

목격했을 범인을 추리다가 결국 H는 포기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 녀석이 깨기 전에는 못 나갈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고 다시 데클란의 가슴팍에 뺨을 기댔다. 단단한 근육 너머로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이상하게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모르겠다. 일단은, 조금만 더 이대로 있자. 아주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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