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Odd?Your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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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깬 건 아침을 훌쩍 넘겨서 거의 밤에 가까운 저녁쯤이었다. 처음 깼던 것이 새벽이니, 반나절 정도를 잤나. 몽롱하게 뜬 눈을 깜빡이다가 무의식적으로 끌어안고 있던 이의 품에 파고들어 얼굴을 묻었다. 그게 누구인지를 자각할 정도로 명료한 정신은 아니었기에, 3분 정도는 수마에 반쯤 잠긴 그 상태로 색색 숨만 내쉬었다.
데클란은 여전히 잠에 취해 몽롱한 듯,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한 채 H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거의 코를 박다시피 얼굴을 묻어오는 통에, H는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 이 자식이, 지금 뭐 하는! 반사적으로 밀어내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간지럽게 와닿았다.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종류의 스킨십에 무딘 건지. 데클란은 그저 편안한 베개를 찾은 어린애처럼 H의 어깨에 뺨을 부볐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인마.”
목소리는 잠겼는지 잔뜩 갈라져 나왔다. 하지만 데클란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으음… 하는 낮은 잠꼬대 비슷한 소리를 내며 더 깊이 파고들 뿐이었다. H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며칠 밤낮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피로는 거짓말처럼 사라졌지만, 그 대신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듯했다.
어깨에 닿는 데클란의 머리카락은 부드러웠고, 일정한 간격으로 느껴지는 그의 숨결은 따뜻했다. 아침, 아니 새벽녘에 잠결에 기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그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탈진 상태였다면, 지금은 너무나도 선명한 감각들이 온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좁은 간이침대는 여전히 두 사람의 온기로 후끈했다. 데클란의 팔은 여전히 H의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었고, 꼼짝없이 그의 품에 갇힌 신세였다.
“정신 안 차리냐, 다 큰 사내놈 둘이서 이게 무슨…”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데클란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더 편안한 자세를 찾으려는 듯 살짝 몸을 꿈틀거렸고,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의 몸이 더 밀착되었다. H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젠장, 젠장! 속으로 외마디 비명을 질렀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달아오르는 얼굴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의무실 안은 저녁 어스름 때문에 제법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가만히 데클란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며칠 전만 해도 죽기 직전의 몰골이었던 녀석이, 이렇게 제 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녀석을 위해 자신의 체력과, 어쩌면 수명까지 써가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자신도. 이 모든 상황이 마치 한 편의 부조리극 같았다.
“…에휴, 모르겠다.”
결국, 그는 포기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 녀석이 스스로 떨어져 나가지 않는 이상, 이 기묘한 동침은 계속될 터였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데클란의 심장 소리가 규칙적으로, 그리고 이상할 만큼 편안하게 귓가에 울렸다. 빌어먹을, 이놈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고 있는 것 같았다.
“... 몇시인데 난리야...”
결국 다그치는 소리에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포기하고 잠잠해지면 그제서야 조금 마음에 든 듯 치대지 않고 가만 있었다. 정신을 차린 건 그보다 10분 정도 더 지난 후였다. 그렇다고 떨어져 나갔냐면... 그건 또 아니지만.
“이제 안 피곤해?”
품에서 고개를 들고 빤히 얼굴을 살폈다. 안색은 좀 나아졌고, 다크서클이야 만성인거 같지만... 좀 옅어졌나? 눈이 또랑한게 피로회복은 잘 한거 같다고 판단하면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 잔거 같네.”
귓가에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시긴 몇 시야, 해가 중천을 넘어 서쪽으로 기운 지 한참이다, 이놈아. 속으로 쏘아붙였지만, H는 입을 꾹 다물었다.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지락거리던 데클란이 이내 잠잠해지자, H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살짝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 정말이지 제멋대로라니까. 하지만 그 제멋대로인 덕분에, 정말이지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감이 거짓말처럼 가셨고,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잡념들도 한결 덜했다. 뻐근한 어깨를 살짝 돌리자 우두둑 소리가 났지만, 그마저도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얼마나 더 지났을까. 품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데클란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살짝 몽롱한 눈빛이었지만, 곧 H의 얼굴을 빤히 마주 보았다. 그 시선에 H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너무 가까웠다.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 서로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상황이 새삼스레 어색하고 민망했다. 제길, 다 큰 사내놈 둘이서 이게 무슨 꼴이람.
데클란의 시선이 제 얼굴 구석구석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안색이니, 다크서클이니 하는 것들을 뜯어보는 모양인데, 퍽이나 살갑기도 하셔라. 평소라면 당장 꺼지라고 쏘아붙였겠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럴 기운도,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쩌면, 이 녀석의 말대로 정말 ‘잘 잔 것’ 같기도 했다. 몸이 가뿐하니 괜한 트집을 잡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 걸 보면.
“야, … 사람 잠 다 깨워놓고 이제 와서 뭘 그렇게 빤히 보냐.”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지만, 평소의 날카로움은 한결 덜했다. 오히려 약간의 퉁명스러움과, 어쩌면 아주 약간의 쑥스러움이 섞인 듯한 어조였다. 그는 데클란의 시선을 피하려 살짝 고개를 돌렸지만, 좁아터진 간이침대 위에서는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다시 데클란을 마주 보았다. 녀석의 백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반짝이는 것 같았다.
“…안 피곤하냐니, 그게 할 소리냐? 너 때문에 꼼짝없이 반나절 넘게 시체처럼 누워있었는데.”
툴툴거렸지만, 진심으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법 개운해진 몸 상태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는 참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잠을 자고 일어나도 찌뿌둥함이 가시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이 녀석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수면제’ 역할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낯간지러운 생각은 입 밖으로 낼 리 없었다.
“일어났으면 좀 비켜라. 무겁잖냐, 이 곰 같은 놈아.”
H는 데클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하지만 그 손길에는 별다른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이대로 조금 더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모순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제길, 정말이지 이 녀석에게 제대로 휘둘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싫은데.”
붙어있으니까 따뜻하고 좋기만 한데 뭘. 안 그래도 간이침대다 보니 푹신한 매트리스도 아니고, 딱딱한 메모리폼 매트 위에 담요 한장 깔아둔 게 전부인 터라 혼자 누워있었다면 제법 추웠을 거 같기도 하다. 잠든 동안 수액은 다 맞은 듯해서 대충 바늘을 빼내고 거추장스러우니 옆으로 치워버렸다. 나름 그래도 ‘전’ 의료인이라고 지혈까지 혼자 하더라.
“이왕 누운 김에 호출 들어올 때까지 누워서 뒹굴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하던가. 드물게도 맞는 말이긴 했다.
H는 데클란의 단호한 한마디에 어이가 없어 잠시 말을 잃었다. 싫긴 뭐가 싫어, 이 뻔뻔한 놈이.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정녕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이러는 건가. 그의 시선이 제멋대로 수액 바늘을 뽑아내고 아무렇지 않게 지혈까지 마친 데클란의 팔뚝으로 향했다. 저 자식, 정말이지….
“야, 너 지금 제정신이냐? 수액을 멋대로 빼면 어떡해! 아무리 전직 군의관이었다지만, 여긴 내 담당이잖냐! 감염이라도 되면 책임질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문득 자신이 데클란의 품 안에 여전히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소리 톤을 낮췄다. 젠장, 이런 자세로는 위엄이고 뭐고 아무것도 서지 않았다. 오히려 앙탈 부리는 모양새가 될 뿐이었다. 그는 데클란의 가슴팍을 있는 힘껏 밀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단단한 근육에 막혀 허사로 돌아갔다. 이 빌어먹을 곰 같은 놈. 힘만 더럽게 세가지고.
“…그리고 누가 누구더러 따뜻하다는 거냐. 네 체온 때문에 내가 찜쪄지는 줄 알았다.”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렸지만, 귓가가 살짝 달아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데클란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간이침대는 삐걱거렸고, 얇은 담요 한 장으로는 새벽의 한기를 막기에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이 녀석의 온기가 아니었다면, 분명 자다가도 몇 번은 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민망한 상황을 순순히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슨 뒹굴거려, 뒹굴거리기를! 여기가 안방인 줄 아냐? 당장 안 비켜? 호출 오기 전에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거든! 너 때문에 내 소중한 휴식 시간이… 아니, 업무 시간이 얼마나 지체됐는지 알아?”
H는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지만, 사실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대로 조금 더, 아주 조금만 더 이 온기에 기대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며칠 밤낮으로 이어진 격무와 스트레스, 그리고 데클란을 치료하며 소모했던 엄청난 양의 집중력. 그 모든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지금, 몸은 나른한 만족감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이성은 끊임없이 경고음을 울렸다. 이러면 안 된다고. 정신 차리라고.
그는 다시 한번 데클란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태평한 표정으로 H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그 뻔뻔함에 H는 기가 막혔지만, 동시에 어딘가 맥이 탁 풀리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이 망할 놈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고 있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 녀석이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말로 호출이 올 때까지…
“알아서 해도 혼이 나네...”
뭐, 호출이 없어도 공사다망한 사람인 건 사실이라 할 말이 없네. 그래도 결국 잔소리를 하다 그가 한 수 접으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아, 그러고보니...
“고맙다.”
감사인사가 아직이었다는 걸 깨달으면 나지막하게 그리 속삭였다. 그가 아니었으면 진즉 명계에 있었을 목숨이다. 마지막 기억이 반쯤 죽겠거니 생각하던 자신임을 떠올리면 그리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깨나 고생했을 텐데.
“놀랐어?”
H는 데클란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알아서 해도 혼이 난다니, 이 자식이 정말이지. 하지만 이어지는 말없이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자니, 마냥 쏘아붙일 기분도 아니었다. 어차피 이 녀석 성격에 제 고집을 꺾을 리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푹 잔 덕분에 평소보다 신경이 덜 곤두서 있었다. 젠장, 이 녀석 페이스에 말리는 건 여전했지만, 그게 꼭 불쾌하지만은 않은 이 상황이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그때,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다고. 진심이 담뿍 담긴, 평소의 데클란답지 않은 솔직한 감사 인사였다. H는 순간 숨을 멈췄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늘 제멋대로에, 능글맞기 그지없는 저 녀석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어둠 속이었지만, 제 귓가가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허공을 헤매다, 결국 데클란의 어깨 너머 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뭐, 뭘 새삼스럽게. 네가 골골대면 귀찮아지는 건 나잖냐.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다.”
목소리가 살짝 잠겨 나왔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대꾸하려 했지만 어딘가 어색하게 떨리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건지.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데클란의 따뜻한 숨결이 목덜미에 간지럽게 와닿았다. 이 망할 녀석,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쩌자는 건지. 괜히 심란해져서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어지는 물음에 H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놀랐냐고? 당연한 소리를. 눈앞에서 숨이 넘어가던 녀석이었다. 제아무리 S급 힐러라지만,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순간의 아슬아슬함,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능력을 쏟아부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의 감정을 정확히 ‘놀랐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경험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흥. 그렇게 쉽게 죽을 놈이었으면 내가 이 고생을 사서 하지도 않았을 거다.”
비꼬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안도감이 묻어났다. 그는 여전히 데클란의 품 안에 갇힌 채,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였다. 좁은 간이침대는 두 사람의 체온으로 후끈했고, 데클란의 단단한 가슴팍에 기댄 등은 이상할 만큼 편안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정신이 들었지만, 여전히 몸은 노곤했다. 그는 슬쩍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이미 밤이 깊어가는지,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무게 때문에 침대가 남아나질 않겠다. 그리고… 슬슬 배도 고프고.”
마지막 말은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이었다. 며칠 만에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하고 나니, 허기가 밀려왔다. 이 녀석을 떼어내고 뭐라도 좀 챙겨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 명줄 하나는 질긴 게 자랑이라서 말이야.”
배고프다면 어쩔 수 없나. 결국 안고 있던 팔을 풀어주고 저도 일어났다. 푹 자고 나니 움직여도 문제없을 정도로 회복된 것 같아서. H에게 안경을 넘겨주고는 자신도 안대를 마저 끼고 기지개를 켰다.
“죽기 전에 네 이름 한 번은 듣고 가야 되는데.”
그러고보니 여태껏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구나. 조금 불공평하지 않나? 나는 S급 에스퍼도 아니라 본명인데. 그런 생각이 들면 빤히 뭔가 바라듯 그를 바라봤다.
“... 안 알려줄 거야? 힌트만이라도 줘봐.”
재차 잡아챈 허리는 답할 때까지 안 놓아줄성싶다.
H는 데클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명줄이 질기다니, 그런 표현도 있나.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사람이 마침내 일어나준다는 사실이었다. 간이침대에서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키니 금세 허리가 뻐근했다. 원래도 좋은 컨디션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몇 시간을 누워 있었으니 근육이 더 경직된 모양이다.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너 살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 와서 잊지 못할 추억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웃기지 마라.”
데클란이 건네주는 안경을 받아 코 위에 걸쳤다. 갑자기 시야가 또렷해지니 현실감이 돌아왔다. 아, 맞다. 지금은 출근 시간도 한참 지났고, 내일은 또 일정이 어찌될지 모른다. 그런데 데클란이 던진 질문에 몸이 굳어버렸다. 이름? 이 녀석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나.
그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이름이라... 코드네임 ‘H’가 아닌, 진짜 이름. 그것은 오래전 자신이 스스로 묻어버린 과거의 조각이었다. 유니온에 들어오면서 버리기로 한 자신의 일부. 그런데 지금 와서 이 녀석이 그걸 묻는다니. 잠시 데클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허리를 붙잡는 데클란의 손에 H는 몸을 빼내려 했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빌어먹을, 아직 회복 중이라면서 이렇게 힘이 세다니. 그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너도 알잖냐. 우리는 코드네임으로 불리는 게 편하다고. 네가 알 필요도 없고.”
그러나 데클란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니 도저히 쉽게 넘어가지 않을 기세였다. 이 녀석, 정말 고집불통이다. H는 잠시 고민하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헤르베르트.”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입안이 마치 오랜 시간 열리지 않았던 상자처럼 먼지 맛으로 가득 찼다. 자신의 본명을 말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헤르베르트 페터 슈나이더. 만족했어? 이제 놓아줄 거냐?”
그의 목소리는 무심한 척했지만, 귓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독일식 이름이 데클란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벽을 하나 허무는 것과 같았으니까.
손목을 돌리며 데클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시도했다. 아직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니케가 헤베라고 부르는 거였군.”
그제서야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오랜 궁금증이 풀린 것 같기도 하고. 귀끝이 빨개진 게 눈에 보여서 웃음을 참고는 그 보답으로 비밀 이야기라도 해주듯 속삭였다.
“좋아, 알려줬으니 ‘랜’이라고 불러도 돼 헤르.”
입술이 귀끝을 스치고 멀어진다. 그새 애칭을 만들어 부르고선 붙들고 있던 허리도 놓아주고는 별일 없었다는 듯 일어나서 제 소지품을 찾는 듯 옷장을 뒤적였다. 워치를 손목에 차고 재킷을 걸쳐 지퍼를 올려 군데군데 찢어져 있던 터틀넥을 가렸다.
“공사다망하실 테니 사올게. 먹고 싶은 건?”
H는 데클란의 말에 잠시 숨을 삼켰다. … 헤르? 제 본명의 앞부분을 따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건 또 뭔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데클란의 입술 감촉과 뜨거운 숨결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 같아, H는 저도 모르게 귀 뒤를 매만졌다. 빌어먹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 자식, 정말이지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데는 선수라니까.
데클란이 아무렇지도 않게 옷가지들을 챙겨 입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H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크게 한번 내뱉었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야, 누가 너더러 멋대로 그렇게 부르라고 허락했냐! 헤르? 닭살 돋잖냐! 그리고 랜인지 뭔지, 내가 네 애칭을 부를 일이 뭐가 있다고! 사람 이름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다, 인마.”
버럭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어딘가 기세가 약한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목소리가 살짝 잠겨 나온 것 같기도 하고. 그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의무실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의료 기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길, 심장이 멋대로 뛰어대는 통에 숨이 다 가빴다. 방금 전까지 이 녀석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떠오르며 낯뜨거움이 밀려왔다. 그것도 모자라 이름까지 알려주고, 이제는 애칭 교환 비슷한 상황까지 오다니. 이게 다 무슨 해괴한 경우란 말인가.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데클란이 옷을 다 챙겨 입고 이제 정말로 떠날 채비를 하는 것 같아 보이자,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이 녀석이 없어야 의무실이 조용해지고 제 할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지만.
“…아무거나. 아니, 됐다. 네가 사 오는 걸 뭘 믿고 먹으라는 거냐. 그냥 빨리 나가기나 해라, 인마. 일해야 하니까. 바빠 죽겠다.”
쌀쌀맞게 쏘아붙이면서도, H는 슬쩍 데클란의 안색을 살폈다. 아까보다는 확실히 혈색이 돌아 보였다. 하긴, 며칠을 꼬박 잠만 잤으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너는 제대로 된 식사로 챙겨 먹으라고 한마디 더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데클란이 이미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순간, 붙잡아야 하나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오지랖이람.
그는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며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서류들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귓가에는 여전히 데클란이 낮게 속삭였던 ‘헤르’라는 단어가 맴도는 것 같았다. 망할 놈의 데클란 워드.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H는 저도 모르게 피식, 짧은 웃음을 터뜨리곤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신 차리자, 헤르베르트. 아니, H.
“왜? 랜이라고 부르고 싶을 때 부르면 되지.”
태클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모르는 척 문고리를 잡았다.
“아무거나. 까다로운 주문이네.”
일단은 알겠다는 듯 손을 휘적이고는 의무실을 나섰다. 나름 몇주간 그에게 챙겨준 것이 있었으니 호불호 같은 거야 애진작에 꿰차고 있을지도 모르지. 잘만 걸어가는 게 며칠전에 죽을 꼴로 들어와서 참 용하다 싶었을지도.
문이 닫히고 데클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H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듯했다. 젠장, 저 녀석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었잖냐. 그는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듯 왼쪽 가슴팍을 가볍게 문질렀다. 아까 데클란이 ‘헤르’라고 불렀던 순간의 감각, 귓가를 스치던 뜨거운 숨결이 생생하게 떠올라 저도 모르게 귀 끝을 매만졌다. 망할 자식, 사람 놀리는 데는 아주 도가 텄다니까.
“야, 멋대로 부르지 말라니까 진짜… 랜? 내가 널 그렇게 부를 일이 뭐가 있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살짝 잠겨 있었다.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애써 표정을 굳혔다. 정신 차리자, H. 아직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의무실 안은 방금 전까지 두 사람이 함께 있었던 온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 미묘하게 공기가 달랐다. 평소의 소독약 냄새에 섞인 데클란의 레더리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는 괜히 코를 킁킁거리며 익숙한 제 공간을 둘러보았다. 엉망으로 구겨진 간이침대의 시트,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진 가운,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지만,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터덜터덜 제 책상으로 걸어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삐걱, 하고 의자가 내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며칠 만에 제대로 잔 덕분인지 머리는 평소보다 맑았지만, 동시에 온몸의 긴장이 풀린 듯 노곤함이 밀려왔다. 턱을 괴고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데클란 녀석, 정말로 아무거나 사 올 셈인가. ‘까다로운 주문’이라니, 짧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동안 데클란이 챙겨줬던 음식들을 떠올렸다. 샌드위치, 포도당 캔디, 커피, 그리고 이름 모를 디저트들까지. 제 입맛 같은 건 이미 속속들이 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심술이 났다. 흥, 네놈이 뭘 사 오든 맛있게 먹어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긴,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게 언제였더라. 그는 책상 서랍을 열어 늘 그렇듯 롤리팝 하나를 꺼내 물었다. 익숙한, 약간은 비릿하면서도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이걸로는 허기를 달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처럼 사탕을 쪽쪽 빨았다.
창밖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또다시 바쁜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밀려드는 부상자들, 끊임없는 호출, 서류 작업.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 모니터를 켰다. 쌓여있는 업무 목록을 확인하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오늘은, 어쩐지 평소만큼 끔찍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아마도,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빌어먹을 아일랜드계 미국인 녀석 덕분이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싶었지만.